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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탑/밤쿤

[올레쿤] Tea

S_Nanak01 2018. 12. 15. 22:19

신의탑 전력 60분

주제 : 정장

뱀파이어물.

정작 두사람이 뭘 하는 건 없음.

뭔가 풀게 많은 글인데...제가 체력이 안돼서 짧막하게 씁니다.

- 2018/12/16 문체수정 및 내용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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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에 태어난 존재들. 언제부터 나타났는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빛과 그림자처럼 그들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있었다. 짐승보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뱀보다 간사한 혀로 인간을 현혹하는 괴물들은 유독 목덜미를 물어뜯는 걸 즐겼다. 웃기는 건, 그들의 주식은 인간의 목덜미가 아닌 혈액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성비가 나쁜 편에 속하는 목덜미를 무는 것도 모자라 식사가 끝날 때까지 사냥감이 죽지 않게 조절을 하며 피를 마셨다. 상당히 어리숙한 사냥이었으나 모든 뱀파이어들은 사냥감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있는 채로 흡혈하는 것을 고집했다. 쿤은 괴물들의 모순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의 사냥이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닌 어떠한 의식을 치루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짤막한 감상을 끝낸 푸른 눈동자가 눈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갈색에 가까운 금발머리에 숲을 닮은 눈동자가 미안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쿤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너 정말 그만둘 거야?”

시리기만 했던 푸른 눈동자가 아쉽게 일렁였다. 후배는 정식일원이 된 지는 얼마 안됐지만 제 몫은 톡톡히 하는 아이였다. 그들이 사냥해야 할 것은 적은 인원으론 버거웠기에 한 사람의 빈자리는 꽤 컸다. 쿤이 녹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눈앞에 선 남자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 죄송해요 선배. 시작한 지 얼마 안됐지만 너무 끔찍한 걸 자주 봤더니 이젠 쉬고 싶어요.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나 지으려구요.”

그러고보니 부모님이 차 사업을 하신댔지?”

. ! 선배에게도 보내드릴게요. 요새 아버지가 헌터들을 위한 약차를 연구하고 있다 했거든요.”

흐음. 날 이용해 시험하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감히 3번대 대장에게 무슨 짓을 하겠어요!”

억울함으로 가득한 표정에 쿤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성품만큼이나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후배의 다채로운 표정은 닳고 닳은 쿤의 입장에선 쿡 누르면 반응하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쿤은 씁쓸한 마음을 장난을 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래 어쩌면 죽어서 내려가는 것보다 살아서 내려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쿤 또한 이 일을 시작하면서 밥 먹듯이 동료의 죽음을 봐왔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하더라도 그의 따뜻한 성격엔 맞지 않으리라. 쿤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후배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아. 보내주면 잘 마실게.”

쿤의 장난기어린 대답에 후배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남자는 오랫동안 숙이느라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힘겹게 펴지는 등과 함께 눈썹이 절로 찡그려졌다. 고통 섞인 신음을 뱉은 남자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남자의 주변은 선선한 봄 날씨와 푸른빛의 차나무로 적셔있었다. 곧게 흐드러진 잎들은 파릇파릇했고 바람은 시원했지만 남자에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니 지겹다는 것에 가까웠다. 남자가 제 품에 있는 바구니를 바라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에휴, 언제 다 한담. 그래도 헌터 일을 할 때는 중노동으로 고생할 일은 없었지.”

무의식적인 말에 남자는 헛웃음 지었다. 뱀파이어도, 죽어가는 동료도 싫어 고향으로 도망친 주제에 조금 힘들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신이 알량하게 느껴졌다. 반성의 의미로 고개를 저은 남자가 다시 차나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아침, 아버지가 나머지 찻잎을 다 수확해야 한댔으니 어서 찻잎을 따야했다. 정작 그렇게 말한 사람은 서고에 가서 책만 보고 있지만 말이다. 왠지 불공평함이 느껴지는 기분에 남자의 입술이 자동으로 삐죽거렸다. 찻잎은 품질을 위해서 반드시 맨손으로 따야했다. 게다가 찻잎은 말 그대로 차나무의 잎인지라 열매보다 빠른 주기로 수확해줘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노동덕분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길이 절실하건만, 아버지는 새롭게 발견한 차나무종의 재배법을 연구하겠다며 서고에 박혀있었다. 덕분에 나머지 가족들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느라 선선한 날씨에도 땀을 빼고 있었다. 그래도 마냥 나쁜 것만 아니었다. 기계적이고 단순한 노동은 심적으로 지친 사람을 하여금 많은 치유를 줬다. 우선 잡생각을 하지 않으니 좋았고,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발효시킨 차를 마시며 바라볼 때면 안 좋은 감정이 뻥 뚫릴 정도로 행복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하고 마음이 다르다더니. 남자는 이곳에 올 때 까지만 해도 동료들의 죽음과 강력한 뱀파이어의 힘에 모든 의지를 상실했었다. 임무를 할 때의 긴장감도 견디기 힘들었고, 조금만 실수해도 다치는 동료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죄책감으로 심장이 조여들었다. 일개 막내가 이정도로 힘겨워하는데 대장의 책임과 스트레스는 더 컸을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대장이었던 푸른 머리의 그를 떠올렸다. 그의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력도, 강한 힘도 능력도 모두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대부분의 어린 헌터들이 그렇듯 자신 또한 그를 동경하며 처세술을 배웠더랬다. 높은 난이도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존경하는 그에게 닿았지만 재능 없는 헌터들이 그렇듯 그도 지쳐 나가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차를 보내겠다고 했었지. 남자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농장 일에 허덕이느라 그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을 그만 잊어먹고 만 것이었다. 그에겐 아버지가 연구하는 시제품을 준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연구를 보건데 아마 몇 십 년은 걸릴 것 같았다. 차라리 다른 차를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남자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우리집 차를 보내기엔 좀 그렇지..흔한거고.”

뭐가요?”

,누구세요?”

, 제 이름은 비올레예요. 쥬 비올레 그레이스. 여행하는 중인데 길을 잃었어요.”

아아..”

찻잎을 꼭 닮은 눈동자가 눈앞의 비올레라 불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전체적으로 검은 옷차림이었는데 길게 내려진 갈색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고왔고 금빛눈동자는 봄의 햇살을 닮아있었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 피부는 여행객이라기 보단 귀족의 자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행객을 본 남자의 고개가 조금 기울여졌다. 그는 분명 평범했음에도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뱀파이어들을 마주칠 때 흔히 갖는 느낌. 남자가 여행객을 빤히 바라보자 금빛 눈동자가 의문으로 둥글어졌다.

저기..?”

! 죄송해요. 하하, 외지인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다보니... 이 길을 쭉 따라 내려가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 농장의 주인이신가요?”

주인은 아버지고 저는 이 집 아들이에요.”

그렇군요. 무언가 고민하고 계시는 것 같던데..혹시 농장일 때문이라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예에? 아유 그럴 순 없죠. 여행객이신데..”

맑게 울리는 목소리에 남자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사근사근하고 상냥한 말투에 남자는 방금 전에 느꼈던 여행객의 첫인상을 지워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직업병도 아니고, 대낮에 양산도 없이 잘 돌아다니는 사람에게서 뱀파이어의 느낌이라니. 말도 안됐다.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 사실 농장일은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일이여서요. 으음..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잘해주셨던 선배에게 차를 보내드리고 싶은데..사실 제가 아버지의 연구가 완성돼서 차로 출시하게 되면 보내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아직...이네요. 하하, 아 일단 내려갑시다. 길은 이쪽이에요

남자가 여행자를 데리고 집을 향해 걸었다. 나무를 위해 만들어진 길은 푸른빛으로 가득 차서 자칫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길 자체는 직선밖에 없어서 알려주면 금방 목적지로 갈 수 있었다. 남자는 아직 찻잎을 따야했지만 일 보단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쪽을 택했다. 쳇바퀴 돌 듯 굴러가는 일상에 호감이 느껴지는 사람과 만난 것도 있었지만 여행객은 아는 것이 많았고 그가 가진 얕고 넓은 지식은 남자에게 대화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여행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차를 대접받고 나서는 차나무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여행객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건넸다.

헌터들을 위한 약차라...정말 멋진걸요?”

, 확실히 그 차나무종이 몸엔 좋지만 키워내는 것도 까다롭고 맛도 향도 너무 안 좋거든요. 그래서 재배법부터 연구하신다고..”

성공한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되겠어요. 새로운 재배법이라. , 별건 아니고 저희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재배법이 있는데 그건 어떠세요?”

말을 끝낸 여행객이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붉은 빛의 찻잎이 쌓여있는 걸 본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라? 아버지가 구한 차나무의 찻잎과 똑같이 생겼네요?”

완전히 같진 않아요. 개량한 거거든요. 그마저도 아주 소수만 성공해서 저희 집에도 몇 그루 자라지 않는답니다. 처음엔 좀 쓸 수 있는데 먹다보면 달아요. 드셔보실래요?”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여행객의 흔쾌한 대답에 남자는 얼른 부엌으로 가서 새로운 찻주전자와 컵을 가져왔다. 찻주전자를 받은 여행객이 말려진 찻잎을 몇 개 넣곤 뜨거운 물을 부었다. 뜨거운 물을 부운지 얼마 안됐음에도 찻주전자 사이로 향긋한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품질이 좋은 차였다. 기분 좋게 향을 맡던 남자의 고개가 조금 기울여졌다. 분명 찻잎이었는데 향은 꽃향기에 가까웠다. 어떻게 키운 거지? 남자가 의문 섞인 눈으로 눈앞에 앉은 그를 바라봤다. 여행객은 차가 우려지는 걸 기다리는 지 주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또다시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자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서늘하고 어두운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맞물린 풍경 또한 빛을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돋는 소름에 남자가 제 팔을 문지르자 여행객이 찻주전자를 들고 남자의 컵에 차를 따랐다. 주전자에서 흘러나오는 찻물은 이상할 정도로 붉었다. 본능적으로 먹기 싫은 기분이 들었지만 사양할 구실이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레 차를 들이켰다. 남자의 목울대가 넘어가는 걸 주시하던 금빛 눈동자가 다정하게 물었다.

어떠세요?”

..확실히 처음엔 쓴데 나중엔 다네요? 향도 정말 좋아요.”

남자가 황홀하게 대답했다. 특유의 꽃향기가 나는 차는 한 번 입에 머금은 순간 멈추기 힘들 정도로 술술 넘어갔다. 입을 델 정도로 뜨거운 온도임에도 남자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들이켰다. 컵이 비워지자 이번엔 찻주전자 째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맞은 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티타임은 찻주전자가 비고 나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남자가 안타까운 신음을 뱉자 여행객이 매력적인 제안을 제시했다.

원하신다면 알려드릴까요? 차를 재배하는 방법.”

..그래주시면 감사하고요...”

하지만

“?”

당신들만 알고 있어야 해요. 지켜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원하신다면 팔을 그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호언장담하면 대답했다. 왠진 알 수 없으나 눈앞의 여행객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남자의 대답에 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

 

 

쿤이 거울 앞에 섰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난 뒤에 들어왔음에도 쿤의 옷차림은 나갔을 때와 거의 똑같았다. 쿤에게 있어 오늘의 차림새는 조금 특별했는데, 평소 입던 헌터전용의 제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글랜체크수트라고 불리는 체크 패턴과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밝은 갈색의 자켓이 쿤을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었다. 차분한 색상과 자켓의 무늬가 쿤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조금 유하게 만들었다. 자켓의 앞주머니엔 가문의 상징으로 패턴화 된 포켓스퀘어로 포인트를 줬고, 자켓의 안쪽에는 하늘빛의 조끼가 단정하게 잠겨있었다. 넥타이는 포켓스퀘어와 같은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이었다. 와이셔츠는 평소에 입던 것과 같은 하얀색이었는데 집에 돌아왔음에도 변함없이 빳빳하게 다려있었다. 자신의 옷차림을 감상하던 푸른 눈동자가 이번엔 위를 향했다. 늘 내려있던 앞머리가 단정하게 올라가 있었다. 흠 하나 안 보이는 완벽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쿤이 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헝클이기 시작했다. 짜증스런 파티와 효자놀이는 끝을 낼 시간이었다. 쿤은 몇 시간 전, 가족행사에 참여하라는 빌어먹을 아버지의 호출에 반 강제로 정장을 입고 본가에 다녀왔었다. 주변사람들의 인사와 안부에 적당히 대답하며 아무렇게나 시간을 벌다가 아버지가 반쯤 취해 여자들이랑 놀기 시작하자마자 잽싸게 집으로 돌아왔더랬다. 쿤은 제 몸을 꽁꽁 싸매는 자켓을 아무렇게나 벗어버리고 압박하는 조끼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 하고 내쉬는 한숨과 함께 소매마저 풀어내리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마음 같아선 허리띠도 풀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쿤은 단단하게 조이는 구두를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책상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쿤은 책상 옆에 달린 서랍으로 향하더니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을 꺼냈다. 약간 붉게 물든 찻잎을 담은 그것은 후배가 보내준 것이었다. 쿤은 보통 찻잎을 서랍에 두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시는 것이었기에 원할 때마다 즐길 수 있도록 동선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침실은 물론, 욕실, 서재, 서랍까지. 쿤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준비된 뜨거운 주전자와 고급스런 찻잔은 어느덧 유리병과 세트가 되어있었다. 쿤이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향긋하게 올라오는 꽃향기에 굳어있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려졌다. 얌전히 닫힌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찻잎을 넣고는 옆에 있는 뜨거운 물을 가득 부었다. 뚜껑을 닫은 쿤이 어서 우려지라는 듯 살살 흔들었다. 후배가 보냈다던 약차는 쿤의 생각보다 효과가 굉장히 좋았다. 아직 시제품인지라 쿤만 마시고 있었지만 지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마시면 얼마안가 기력이 회복됨과 동시에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실제로 의사에게 몸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단 진단도 받았다. 찻잎은 쿤이 다 마실 즈음 안부편지와 함께 보내졌다. 효과를 톡톡히 보았기에 어떤 차냐며 물었지만 후배는 아버지의 비법이라 말 못한다며 웃을 뿐이었다. 몇 번을 더 돌리던 쿤이 찻주전자를 들고 잔에 찻물을 가득 채웠다. 피를 닮은 붉은 색이 나와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쿤에겐 익숙한 광경인지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달달하게 올라오는 향에 어서 입안에 넣고 싶을 뿐이었다. 처음 마실 때까지만 해도 쓰기만 하던 차는 마시면 마실수록 점차 달아졌다. 좋아진 맛만큼 자주 생각나는 차였다.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쥐고 쿤이 후후 불며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들이켰다. 꽃향기와 함께 넘어가는 부드러운 단맛이 짜증스러웠던 기분을 풀어주고 있었다. 쿤의 눈동자가 나른하게 내려갔다. 빛을 받아 흔들거리는 액체를 물끄러미 보던 쿤은 문득 파티를 하던 당시 어떤 남자와 인사했던 게 떠올랐다.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금빛 눈의 남자였다.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풍기는 꽃향기가 차의 향기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남자의 향을 맡은 순간, 쿤은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가 향수가 잘 어울린다며 말을 걸었었다. 그저 남자를 붙잡기 위해 걸었던 말이 반쯤 진심이 되어 브랜드를 묻자 남자는 대답대신 다른 질문을 할 뿐이었다.

혹시 주기적으로 드시는 차가 있으신가요?”

남자의 말에 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배가 보내준 시제품을 마시고 있다고 했더니 그도 마시고 싶다며 미소를 지었었다. 이름이 뭐랬더라.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르게 그는 상당히 존재감이 없었다. 두 사람이 얘기하는 도중에 몇몇 사람들이 끼어들긴 했지만 남자를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쿤이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마음을 앗아가는 단향과 함께 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각이 나지 않던 남자의 이름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쥬 비올레 그레이스

쿤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늘 동그랗던 동공이 평소보다 얇아져 있었다.

 

 

***

 

 

만월이었다. 비올레는 이젠 눈에 익숙해진 차 농장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한때 파릇파릇했던 차들은 전부 엉망이 되어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손보지 않은 건지 무릎까지 자란 잡초에, 제 멋대로 뻗쳐있는 가지는 물론이고 진작 수확했어야 할 열매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기이 할 정도로 으슥한 곳엔 농장의 주인들이 미쳤다는 소문만이 나돌 뿐이었다. 혹여 뱀파이어의 짓이 아닌가 하며 헌터들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갔다. 비올레가 손끝으로 찻잎을 매만지며 집 쪽으로 내려갔다. 비올레는 보름달이 뜬 밤을 좋아했다. 자신의 힘이 충전되는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최근 사랑을 가르쳐 준 그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쿤 아게로 아그니스. 쿤은 비올레를 잘 알지 못했지만 비올레는 쿤을 잘 알고 있었다. 쿤은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두려움, 유능한 헌터, 쿤 가문의 자제였다. 강한 존재를 좋아하는 비올레에게 쿤은 매력적인 배우였다. 때문에 늘 먼발치에서 쿤을 바라봤었다. 극단의 VIP석에 앉은 사람처럼 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달빛을 담은 푸른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며 뱀파이어를 죽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어떤 때는 자신이 몰래 참여해서 그를 이끌어주기도 했었다. 그의 체향은 비올레를 유혹했고 그의 생명력은 얼려진 심장을 뛰게 했다. 인간도, 뱀파이어도 흥미가 없던 그는 드물게도 쿤을 갖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자신의 피를 머금은 차나무를 기르고 차 농장을 찾아가 그의 후배에게 먹였다. 대부분의 인간은 아무리 희석시켰다고 해도 먹자마자 차에 미치거나 뱀파이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의 괴물이 되었지만 그는 천천히 비올레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비올레가 찻잎을 하나 따며 칭찬하듯 말했다.

당신은 어떤 향기가 날까요?”

영리하고 강한 그가 뱀파이어가 된다면 헌터들을 꽤나 고생시킬 것이다. 그가 자신의 권속의 뱀파이어가 되면 꽤 즐거울 것이다. 강한 독성 때문에 비올레의 피를 바라면서도 먹지도 못하는 하등한 놈들과는 달리 그는 제 주인의 피를 마시고 더 달콤한 향기로 돌아와 비올레의 입을 즐겁게 해줄 테니까. 특히나 관계를 가질 때 그의 피를 마신다면 끝내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침대위에서 순순히 제 목덜미를 내미는 걸 보고 싶었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비올레가 문 앞에 다다랐다. 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나무 짝의 안쪽에서 괴상 할 정도로 마른 남자가 저를 꼭 닮은 늙은 여자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한때 나뭇잎처럼 파릇했던 눈동자는 붉게 변질되어 있었고 팔다리는 짐승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남자에게 목을 뜯긴 여자는 절망에 가득 찬 눈으로 비올레를 바라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저 정도가 되면 제 아무리 비올레라도 구제해 줄 길이 없었다. 비올레가 허겁지겁 피를 마시는 남자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당신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그래도 차 재배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증거를 없애기 위한 뒤처리를 도와준 것도. 이번에 보낸 걸 다 마시면 그도 저와 같아지겠죠. 늦기 전에 그에게 가야겠어요. 어린 뱀파이어에겐 가르쳐줄 게 많거든요.”

그럼 안녕히. 비올레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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