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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합작!
신혼 밤쿤/반말하는 밤 주의.
지나간 시간(上)
결혼한 이후 쓰지 않게 된 집을 처분하게 되면서 밤은 새삼스레 선별인원 시절의 옷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제는 작아서 입지 못하는 게 대부분인 옷들은 하나같이 추억이 묻어있었다. 처음 탑을 오르던 때의 입던 것들, 입을 게 없어서 샀던 것들, 층의 시험을 칠 때 입던 것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조금 큰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난 뒤 입었던 것이었다. 하나같이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옷가지들 사이에서 붉은 원이 눈에 들어왔다. 20층에 오른 시절에 입던 FUG 옷이었다. 탑을 오르는 내내 힘겨움의 연속이었지만 밤은 이때가 가장 힘들었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FUG가 제 친구들을 죽일까 전전긍긍해하며 오르던 나날. 그 중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어머니의 자취가 남은 아를렌의 손에 있었던 일이었었다.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뻔했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다 빛 속으로 사라지던 푸른 눈동자를 기억한 밤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추억여행?”
“아, 아게로.”
이제는 배우자가 된 쿤이 웃으며 밤에게 다가왔다. 검고 붉은 무늬가 박혀있는 옷을 보던 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응? 이건 내가 본 적 없는 옷인 거 같은데. FUG..옷이지? 작은 걸 보니깐...20초반 쯤이었을 때려나.”
“아, 응. 20층에 왕난씨를 처음 만날 때 입었던 옷이야.”
“나참, FUG의 기대주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걸 그냥 막 입고 다니면 어떡해.”
쿤의 걱정 섞인 목소리에 밤이 멋쩍은 듯 미소 지었다. 표적이 될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슬레이어의 옷을 입은 건, 누군가가 희생당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탕수육팀이 생긴 것은 관계에 집착하는 스물다섯번째 밤과 동료를 지키고 싶었던 쥬 비올레 그레이스의 사이의 모순의 합일 지도 모른다. 밤이 잠시 추억에 젖은 사이, 쿤이 무언가 떠올렸는지 아무렇게 쌓여있는 박스들 사이로 걸어갔다. 옷을 하나하나 꺼내며 뒤적거리는 모습에 밤이 고개를 돌리니, 쿤이 무언가를 찾았는지 긴 망토 하나를 집어 올렸다. 아를렌때 입었던 옷이었다. 밤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쿤이 이젠 작아진 옷을 제 몸에 대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다 쿤의 아들이여-. 내가 너를 죽이려 했다. 그래서 이 함정을 파고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아게로-.”
극에 오른 배우처럼 웅장하게 울린 목소리에 보기 좋게 뻗은 갈색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탑을 오를 때만 해도 현실적이고 냉철했던 제 사랑은 결혼을 하더니 장난꾸러기가 다 되어 있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 서툴기 짝이 없는 연기를 했었던 모습 그대로 흉내 내는 모습에 화를 내 볼까하다가도 키득거리며 웃는 눈동자에 순식간에 마음이 풀렸다. 밤이 옷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뻗자 쿤이 뒤로 물러나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나는 너희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되려는 자.”
“정말..기억력이 좋다는 게 이럴 땐 너무하다니까.”
“후후, 네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었거든.”
심통으로 굳은 뺨을 본 쿤이 그제서야 옷을 넘겼다. 봐달라는 듯 눈꼬리를 접는 걸 본 밤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신혼여행까지 갔다 와 놓고 나보단 FUG의 슬레이어가 보고 싶었나봐?”
“신혼여행까지 가놓고 일만하는 남편보단 날 놓아주려했던 슬레이어가 나을지도?”
마냥 밝은 목소리에 은근한 심술이 묻어있었다. 신혼여행을 갔다고는 하나, 밤은 바빴다. 밤의 입장에선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쿤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속으론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밤이 사과하려는 듯 다가가자 쿤이 뒤로 피했다. 웃고 있었지만 몸은 단호했다.
“정리. 열심히 해.”
매정하게 돌아가는 등을 본 밤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화를 내면 밤으로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섭섭함으로 가득한 마음을 그냥 뒀다간 더 쌓일게 뻔했고 그렇다고 사과하자니 받아주지 않을게 뻔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군다는 건 참다 참다 폭발한 것이었으니까. 난감함으로 흐려진 금안 속에 검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
쿤은 입술을 씹었다. 밤이 원래 그런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도통 잘 되질 않았다. 차라리 선별인원 시절처럼 반쯤 체념하면 어떨까 싶다가도 마음이란 게 쉽게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정도를 모르는 남편이 알아줄 리도 없었다. 결혼 전에도 은근 무심했지만 결혼 후에는 더 심해진 행동에 쿤의 마음이 속상함으로 물들여졌다. 푸른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기울여졌다. 나를 사랑하긴 하는 건가? 그냥 내가 자길 사랑해주니까 맞춰주는 게 아닐까. 사실 사랑해주는 존재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으로 가득 찬 머리가 뒤틀린 의문을 속삭였다. 여전히 밤을 사랑하는 쿤 아게로 아그니스의 이성은 바로 반론을 제기 했지만 증거랍시고 나오는 것들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쿤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걸 마음에 쌓아 두고 싶지도 않았고 밤을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나 방금 전 일은 자신치곤 심한 짓이었다. FUG는 그에겐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한데. 서로 웃고 넘겼다지만 상처는 상처였다. 쿤은 새삼 자신의 속상함 때문에 밤을 공격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바빠서 관계가 소원해진 게 뭐 어떻다고 어차피 평생을 함께할 텐데. 이러나저러나 자신은 욕심이 지나치게 많았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섰다. 쿤의 마음과는 별개로 밖은 축제의 활기로 가득했다.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유령으로 분장하고 다니는 축제였다. 현실적인 쿤 아게로 아그니스 입장에선 미신에 가까워 보이는 행위를 굳이 축제로 만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관광비가 들어오니 그러려니 했다. 쿤은 바깥에서 이상한 분장을 하며 뛰노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바라봤다. 일도 잘 안돼는 데 나가서 기분전환이나 할까. 가주가 된 이후로 여기저기 팔린 얼굴 덕에 쇼핑하러 나가는 것도 곤란했지만 오늘처럼 너도 나도 진하게 분장하고 다니는 날엔 나가도 딱히 못 알아 볼 것 같았다. 가면을 쓰고 다니면 아무도 모르겠지. 나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쿤이 몸을 돌리는데 찬물을 붓듯 포켓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비서에게 온 것이었다. 쿤이 고개를 저었다. 기분전환 하는 것도 틀렸나. 곧 쏟아질 일처리를 생각하며 쿤이 전화를 받았다.
***
밤에게 화낸 것도 무색하게 쿤은 밤늦게까지 업무에 붙잡혀 있었다. 평소라면 저녁시간엔 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했겠지만 쿤이 심술을 부려서 그런 건지 아님 이사준비로 바쁜 건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쿤 또한 일 때문에 10분만 이라는 말을 되뇌다 새벽3시가 넘어서야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며 방으로 돌아갔다. 하루 일과 중 두 사람이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는 방 앞에서 쿤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혹여 자고 있을 남편이 깰까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오후에 자기가 비꼬았던 말들이 미안함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사과해야겠지. 쪽지라도 적어둘까 생각한 쿤이 문을 천천히 밀었다. 유명한 장인들이 모여 만든 문은 화려함만큼이나 고요했다. 쿤이 열린 틈으로 침대 쪽을 바라봤다. 자고 있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의아해진 쿤이 문을 더 크게 열며 고개를 돌리자 창문 쪽에 밤이 서 있었다. 밤은 고요함 속에서도 쿤이 왔다는 걸 알았는지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건넸다.
“왔어?”
“아직 안 잤네?”
쿤의 말에 밤이 우물거리더니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꺼내기 힘들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주저하던 밤이 고개를 들더니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 때문에 화났잖아. 그래서 잘 수가 없었어. 내가 너무 내 일에만 신경을 써서 당신에게 상처를 줬잖아..미안해. 아무리 당신이 이해해준다고 해도 신혼여행 땐 당신만을 신경 써야 했었는데... 괜찮다면 다음 주에 시간이 된다면 2박3일정도 놀러갈까? 당신 비서에게 물어보니깐 그때는 일정이 빈다고 해서.. 당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나 그땐 정말 시간이 비거든. 일이 생겨도 포켓이랑 이런 거 다 끌 테니까..”
미안해하는 밤의 모습에 쿤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쿤은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기려는 듯 땅을 보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 바쁜 거 뻔히 알면서..요새 스트레스가 쌓였나봐.”
“아니야... 아, 그리고 말인데..”
“?”
“아까 FUG 슬레이어가 좋다고 했잖아. 그래서 연습해 봤는데...”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배우자의 모습에 쿤은 웃음을 꾹 눌렀다. 밤은 쿤이 웃으려다 마려는 걸 알았는지 볼이 살짝 빨개졌지만 쿤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 정도는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쿤이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댔다. 다시금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짐짓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뭘 하려고?”
“음..오늘 할로윈이고..할로윈 밤에는 연인이나 부부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플레이를 즐긴다길래..”
“그래서 나랑 하자? 그런 걸 좋아하는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잖아? 내가 정말 그걸로 용서해 줄 거라 생각한 거야? 아직 날 잘 모르네?”
얼음처럼 쏟아지는 말과는 달리 쿤의 마음은 이미 풀려있었다. 일부로 날카롭게 말한 건 밤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제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니 놀리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답에 그는 곧 당황하리라. 쿤의 생각대로 지적을 받은 금안이 낭패로 흔들렸다. 사과를 하고 기분을 풀어준 다는 거에 급급해 쿤이 어떤 플레이를 좋아하는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밤이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어..음..그럼 다른 걸 할까? 당신이 좋아하는 거면 뭐든지..”
“됐어. 사랑하는 자기가 준비했다는 데 거부하면 실례지.”
쿤이 문에서 몸을 뗐다. 구두가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밤의 코앞까지 간 쿤이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아를렌때처럼 요상한 연기를 하는 슬레이어님이면 실격이야? 기다려 줄 테니까 갈아입고 와.”
“그럴 필욘 없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을 떠올리면 쉽게 되니까. 밤의 대답에 푸른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검은 신수가 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짧게 곱슬거렸던 머리가 길어지고 간단하게 입었던 티셔츠는 쿤이 방금 전 FUG문양이 가득했던 복장으로 변해갔다. 다정함으로 가득 찬 신수는 검고 끈적하게 변해갔다. 쿤이 본 적 없는, 아를렌에서 만나기 전의 쥬 비올레 그레이스였다. 석양이 지는 금안은 분명 알던 눈동자임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밤이 가끔 FUG흉내를 낼 때 가발을 쓰긴 했지만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알던 밤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에 쿤이 이름을 불렀다.
“밤..?”
쿤의 대답에 내려온 금안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푸른 바다를 담은 태양은 밤에 떠오른 듯 음울했다. 쿤은 밤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눈동자 속은 온갖 감정으로 뒤엉킨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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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글이 꾹음글인데 떡까지 합쳐서 내면 어리신분들은 볼 수 없으니 전반부는 보실수 있게 잘라보았습니다.(하편을 다 못쓴것도 있음)
하편은 밤에 올라올 예정이고 말했듯 수위임니다~~~걍 비올레 코스를 하고 떡을 치는 내용임으로 안보셔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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