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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탑/밤쿤

[올레쿤] 서열

S_Nanak01 2017. 12. 10. 02:20

신의 탑 전력 60분 주제 : 빌런

 

내용 자체가 쪼끔 어둡습니다.

폭력적인 부분이 많이 언급되므로

 

이 부분이 스치듯 나와도 싫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십시오.

 

수위 살짝있음.

 

귀족 비올레와 화인 쿤.

 

 

 

화인 : 독을 머금은 씨앗을 품고 태어나는 자들. 귀족에게 안김으로써 독을 해소할 수 있다. 귀족에게 안기면 몸의 한 구석에 씨앗문신이 생김. 이후 씨앗을 만들어준 귀족(주인)에게 안길때만 꽃이 핀다. 강제로 안기면 1년 내에 시듦. 요새는 기술이 좋아져서 굳이 안기지 않아도 약으로 해결 할 수 있다.(단 매우 비쌈.)

 

 

***

 

 

쿤 아게로 아그니스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그는 서열관계를 다지는 것. 이라 대답할 것이다.

 

 

소독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남들은 꺼려하는 냄새였지만 쿤은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냄새였다. 쿤은 의자에 앉아 곱게 누워있는 여성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어머니. 다녀올게요.”

“...”

 

여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쿤은 여인의 대답을 듣는 대신 쥐고 있던 손을 놓고는 일어섰다. 10.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녀는 늘 이렇게 대했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상당히 매정한 방법이겠지만 쿤에겐 더 없이 평화롭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이보다 더 심하게 대했으니까. 그녀는 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대했었다. 손이나 발로 때리는 건 늘 있는 일이었고, 어쩔 땐 도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도구라고는 하나,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들처럼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요리를 하거나, 빨래를 하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손에 있는 아무거나를 사용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폭발했을 때 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화가 최대한 빨리 풀어주기 위해 협조하는 것뿐이었다. 조용히 인형처럼 웅크려 신음조차 내지 않는다. 그녀가 빨리 화를 풀 수 있도록. 그래도 요새는 좀 나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녀는 단지 눈을 감는 것으로 폭력을 행했다. 어쨌든 폭력이었지만 쿤은 그래도 좋았다. 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는 기분이었다. 어쩔 땐 곁에 누워도 잠만 잘 뿐 때리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쿤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거실과 화분 속에 웅크려있는 자란이었다. 흙속에 파묻힌 생명은 마치 어린 시절 저를 보는 듯 했다. 봄이 되고 계절이 따스해지면 생명은 다시 자라 꽃을 피울 것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저와 제 어미처럼. 화분을 보던 쿤이 식탁으로 다가갔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한 식탁에는 아침이라고 써져있는 약봉지와 유리컵에 담겨진 물이 전부였다. 의사는 꼭 밥을 먹고 약을 먹으라했지만 쿤은 그냥 먹었다. 이런 약을 먹는다한들 자신의 병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꼬박 먹는 것은 역시 약을 먹지 않으면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잔소리라기 보단 히스테릭에 가까웠지만. 그녀는 쿤이 발병한 이후 병적으로 약을 먹였다. 약으론 어찌할 수 없는 병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마 아버지의 유전병이 저에게 발발한 것에 적잖은 충격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쿤은 한숨을 쉬었다. 쿤이 앓고 있는 병은 불치병이 아니었다.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을 나을 방법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 방법은 쿤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상처를 남길 테니까. 약을 먹은 쿤이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어쩌면 내년에는 화분에게 인사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의사가 이대로 가면 올해를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망과 슬픔으로 눈물바다가 되었겠지만, 쿤은 오래전부터 각오했기 때문에 별 타격은 없었다. 쿤은 슬퍼하는 대신 삶의 마지막 준비를 시작했다.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죽은 뒤에 어떤 서류를 처리해야하는 지 알아봤다. 어머니가 할 일이었지만, 쿤은 그녀가 부담을 갖지 않길 바랬다. 그리고 혼자 남을 어머니를 위해 해야 할 것 또한 많았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지금 경영하고 있는 카페를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지만. 쿤이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자고 있을 그녀가 현관문 소리에 놀라 소리 지르지 않도록. 이러니 저리니 해도 쿤은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

 

비올레님. 이번 꽃은 어떠십니까?”

 

볼 살인지 주름살인지 얼굴이 돼지처럼 쳐져있는 남자가 저보다 훨씬 젊은 남자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소중히 키운 딸아이니, 잘 부탁드린다는 둥. 몸에 핀 수선화가 아름답지 않냐는 둥의 소리를 했다. 서류를 바라보던 젊은 남자. 쥬 비올레 그레이스는 남자의 간절한 마음에 대한 대답인지 아니면 이제야 볼 마음이 생긴 건지 쓰던 안경을 벗고는 여인을 바라봤다. 여자는 비올레의 시선을 느끼자 볼이 빨갛게 물들여졌다. 그도 그럴게 그는 높은 출신의 귀족이었고 국민들은 물론 외국에서까지 신이 내린 얼굴로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그의 마음에 들어 각인을 하게 되면 그의 정원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여인은 천으로 몸을 살짝 가리면서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한 떨기의 꽃과도 같은 자태였지만 비올레는 내심 시큰둥했다. 확실히 여자는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매혹적이었다. 꽃향기도 꽃향기지만 얼굴 자체도 아름다웠다. 아마 경매로 팔린다면 최상품이리라. 문제가 있다면 이 부녀의 목적은 경매가 아닌 것에 있었지만 말이다. 비올레가 속으로 웃었다. 딸이 조금 예쁘다고 기어오르기는. 아름다움도 향도 카페의 그 남자가 훨씬 나았다. 단골 서비스라며 저에게 직접 차를 타주던 남자의 체향이 떠올랐다. 그가 품은 씨앗만큼이나 단아하고 우아한 몸짓에 품에 넣고 싶은걸 필사적으로 참아야했다. 그를 떠올리던 비올레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경매에 내놓는다면 최상품이겠어요. 다른 귀족들이 좋아할 것 같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실은 이 꽃은 상품이 아니라.. 귀족이신 분이 집무실에 꽃 하나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별 거 아니지만 하나 장식해둠은 어떠신지..?”

하하, 그렇네요. 제 사업이 사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거래처분과 뵙는 곳에 둘 꽃은 최상품으로 두고 싶어서요. 제 책상에 놓은 화분보다 더 예쁜 꽃을 생각하고 있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견하진 못했지만요.”

 

비올레가 가리킨 곳엔 인조로 만들어진 꽃이 화분에 장식되어 있었다. 작고 수수한 화분은 단골 기념으로 선물 받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인조화분보다 못한 꽃을 가져오게 된 남자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비올레가 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가 유혹하듯 미소를 지었다. 비올레가 마주 웃었다.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아비와는 달리 머리가 텅 빈 그녀는 비올레가 무슨 소릴 했는지 이해를 못한 모양이었다. 비올레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 그래서 이건 지금 파실 건가요? 나가시면 제 직원이 경매장으로 안내해 줄 겁니다.”

, 아닙니다! 꽃이 별로라니 다른 걸 가져와야겠습니다..가자꾸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던 여자가 비올레의 말에 새파랗게 질렸다. 남자와 여인은 짐과 옷을 재빨리 들고는 인사하는 둥 마는 둥하며 떠났다. 배웅하는 대신 서류에 눈을 돌린 비올레는 신경질적으로 펜을 툭툭 두드리다 정장 소매에 코를 박았다. 그녀의 진한 향이 비올레의 옷에 섞여 들어갔다. 짜증스런 한숨을 쉰 비올레가 부수듯 창문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데이트 신청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서 화나는데 거래처의 사장이란 놈은 기름이나 붓고 앉아있었다. 11. 그의 가게가 오픈 할 시간이었다. 비올레는 서랍에서 탈취제를 꺼냈다. 무색무취인 탈취제는 비올레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탈취제는 돈 없는 하층민들이나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남들보다 코가 예민한 비올레에겐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제가 입는 정장에 탈취제를 뿌린 비올레가 어서 냄새가 빠지길 바라는 듯 와이셔츠를 팔랑였다. 아까보다 사라진 향기에 안심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맘 같아선 향이 완전히 빠지고 난 뒤에 가고 싶었지만 비올레가 한가한 시간은 11시부터 12시까지였고 11시 반부턴 카페가 바빠져서 그의 얼굴은 커녕 말도 제대로 붙일 수 없었다. 비올레가 방문을 나서자마자 문 옆에 서 있던 보디가드들이 따라붙었다. 하진성이 비올레를 위해 선물해준 실력 있는 용병들이었다. 보드가드의 임무에 맞게 그들은 어딜 가든 비올레를 지켰다. 귀족인데다 국가의 큰 사업 중 하나인 꽃의 관리를 맡고 있는 비올레는 이 나라에서 왕가 다음으로 보호해야할 대상이었다. 앞서 걸어가는 비올레의 뒤로 보디가드 중 한 사람이 따라왔다. 그들의 충직함은 믿음직스러웠지만 가끔 답답하기도 했다. 비올레가 시계를 찬 손을 들었다.

 

지금 11시에요. 당신들처럼 덩치 큰 사람이 카페에 들어오면 꽃이 놀랜다는 건 알죠? 난 종류는 세심하게 대해 줘야하거든요. 안 그럼 금방 죽으니까.”

, 죄송합니다.”

 

그래. 그는 특히나 더. 비올레는 고개를 숙인 남자들을 보곤 다시 앞으로 향했다.

 

***

 

싸늘한 날씨라지만 카페에 오자마자 짐들을 나르기 시작하면 더워지기 십상이었다. 다행이라면 카페가 좁아 이동거리가 적다는 것뿐일까. 쿤은 한숨을 쉬었다. 맘 같아선 알바를 구하고 싶었지만 열 명이 겨우 넘게 들어올 만큼 작은 카페에서 직원을 구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장소의 넓이는 그렇다 쳐도 매출도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속 하는 이유는 카페가 생긴 이후로 매일같이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보면 심장이 뛰었다.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그런 것이리라. 쿤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쿤은 그의 얼굴 중 햇살을 녹아 만든 듯 한 금빛 눈동자를 가장 좋아했다. 특히나 그가 미소를 지을 때 그의 눈동자가 곱게 휘어지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달콤한 향기가 나올 것만 같은 눈동자와 달리 그의 몸에선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욱 좋았다. 어머니도 그런 냄새가 났었으니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거에 냄새라고 붙인다는 건 조금 이상한 예시지만 말이다. 쿤은 저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는 그에게 고백을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곧 그만뒀다. 쿤은 본능적으로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귀족. 이 사회의 상류층이자, 사람과 화인들을 감별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 그들의 부와 명예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화인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쿤은 소매를 더 끌어당겼다. 어느 세 부턴가 자라기 시작한 자란이 손목을 뒤덮고 있었다. 자란은 동양난의 일종으로 이름에 맞게 자주 빛의 꽃잎을 지녔지만 특이하게도 쿤은 흰색의 난이 자랐다. 쿤은 착잡하게 꽃잎을 바라봤다. 문신을 하지도 않았는데 몸에 꽃문양이 생긴다는 건 화인이라는 증거이자 모시는 주인이 없다는 의미였다. 화인들은 보살펴 줄 주인을 갖지 못하면 독이 퍼져 금방 죽었다. 주인을 섬기는 것도 귀족의 혈통을 지닌 인간이 아니면 안됐다. 쿤은 아직 누군가를 섬길 자신도 없었거니와 섬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섬긴다는 게 어떤 건지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귀족출신이라도 화인이 되는 순간 인간이 아니라 물건이 되었다. 제 아비가 그랬다. 아비는 자신이 꽃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 몰락한 귀족출신의 어머니를 강제로 안았고 어머니는 꽃도 아닌 여자가 난봉꾼에게 더럽혀졌다며 집안에서 버림받았다. 화인이라 해도 아버지는 귀족출신이었고 강했다. 버림받은 어머니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어린 쿤이 보기에도 그들의 관계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는 그녀의 모습과 강제로 짓누르는 그의 모습을 늘 보고 자라온 쿤에게 사랑이란 꺼려해야 할 것이었다. 꽃이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발작이오는 날이면 비명과 폭력이 난자하는 행동들이 쿤의 꿈속으로 찾아왔다. 가끔씩 꽃임에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감당을 못하고 관계를 끊는 건 쿤 쪽이었다. 그런 그에게 강렬한 사랑이 찾아왔다. 지금까지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끌림이었다.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감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사랑하면 할수록 자신의 더러움만이 남을 뿐이었다. 차라리 화인임을 밝히고 그에게 안기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뇌를 울리는 느낌에 곧 관뒀었다. 상념에 빠진 쿤의 귓가로 방울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쿤이 고개를 들었다. 맑게 휘어지는 금안, 부드럽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빨간 입술. 다정함이 한 가득 담긴 말투. 그의 미소에 쿤의 마음도 함께 빛났다. 곧 그의 체향이 코끝을 스칠 것이다. 아무것도 나지 않는 향기. 나지 않아야 할 향기. 미소를 지으려던 쿤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 아무런 향도 베이지 않아야 할 그의 몸에서 미세하게 화인의 향기가 났다. 쿤이 맡기에도 매혹적인 향에 심장이 아픔으로 죄어왔다. 쿤은 애써 모르는 척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것은 쿤이 가장 잘 하는 일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네요.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맞으시죠?”

.”

 

쿤이 커피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뽑는 동안 비올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향이 진해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비올레는 쿤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잘 숨긴다고는 하지만 손목에 슬쩍 꽃잎이 보였다. 꽃이 저리 마구잡이로 핀다는 것은 주인이 없다는 표식이었다. 다른 화인이었다면 몸이 달아 범해달라는 듯 대놓고 보여줄 텐데, 어째선지 그는 꽁꽁 숨기면서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옷을 벗기면 여기저기에 난이 피어있을 게 분명했다. 죽기 전에 필사적으로 완성한 아름다운 작품처럼. 비올레는 그의 몸에 핀 작품을 감상하길 바랬다. 당장에 제 정원에 데려가 오래도록 사랑해주고 싶었다. 온 몸에 꽃을 두른 채 신음을 내지르는 그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겠지. 욕구가 채워질수록 꽃은 점점 씨앗 속으로 되돌아 갈 거고, 비올레를 주인으로 인식해 주인이 원할 때만 싹을 틜 것이다.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만 피는 꽃. 화인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도 그렇게 되면 좋을 텐데. 비올레가 무표정하게 손목을 바라보자, 오묘한 시선을 느낀 쿤이 무의식중에 손목을 감쌌다. 마침 아메리카노에 뜨거운 물이 다 부어졌는지 종이컵을 들고는 뒤를 돌았다. 뚜껑을 찾는 움직임이 평소보다 서투르고 분주했다. 빨간 귀는 덤이었다. 얼굴을 식히려는지 살짝 고개 숙인 그의 뒷목으로 흰색 난이 피고 있었다. 방금 피어난 듯 강한 향에 비올레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싫어서 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의 향기가 생각보다 유혹적이었기에 지은 표정이었다. 아 정말. 비올레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쿤이 비올레에게 아메리카노를 내놓았다. 아직 붉은 기가 남은 얼굴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메리카..

 

비올레가 쿤의 멱살을 쥐고는 입을 맞췄다. 멍하니 벌려진 입에 들어간 비올레가 쿤의 혀를 잡아채더니 부드럽게 감았다. 아까보다 강해진 향과 꿀처럼 단 타액이 비올레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전에도 몇 번 화인을 안은 적이 있었지만 키스만으로 이토록 좋은 적은 없었다. 당장 그를 벗기고 안에 들어가 각인을 하고 싶었다. 비올레가 멱살을 쥐지 않는 손으로 쿤의 옷을 벗기기 위해 움직이다 무언가를 스쳤을 때였다.

 

..!”

 

허벅지 쪽에 느껴지는 뜨거움에 두 사람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뒤로 물러났다. 성급한 움직임에 아메리카노를 담은 컵이 쓰러진 모양이었다. 컵은 테이블과 부딪힌 충격으로 뚜껑이 날아갔고 내용물은 바닥까지 쏟아졌다. 쿤이 서둘러 냅킨을 들고 테이블을 닦았다. 비올레 또한 픽업대에 있는 냅킨을 몇 십장 씩 뽑아 제 쪽에 흘러진 커피를 닦았다. 당황한 쿤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냥 두세요. 괜찮으니까.”

아니요. 제가 멋대로 그런 짓을 해서..”

“...”

미안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어디 다치신 덴 없어요?”

, ..”

,..시간이 돼서 이만 가 볼게요..”

 

비올레가 재빨리 몸을 돌아 가게를 나갔다. 쏜살같이 빠져나간 그의 자리에는 딸랑거리는 문소리만이 남을 뿐이었다. 쿤은 그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한 키스였다. 쿤은 문득 애인을 가진 친구들이 첫 키스에 대해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노라고, 황홀했다면서 신나게 떠드는 모습을 보며 쿤은 반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기억속의 키스란 서로를 죽일 듯 입술을 물어뜯는 것이었으니까. 방금. 애정을 품은 상대와 해보기 전까지 말이다. 쿤은 친구들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의 말처럼 서로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장 두려워했던 어머니의 잔소리도 곧 죽을 자신의 운명도 잊은 채 그와의 감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쿤은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그라면, 함께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쿤이 핸드폰을 쥐었다. 몇 개 없는 번호의 맨 마지막에 그의 번호가 있었다. 카페를 오픈한 지 얼마 안됐을 시절. 아직 전화기가 없었기에 잠깐 동안 폰 번호를 적어둔 적이 있었다. 첫 손님이었던 그가 핸드폰에 번호를 적더니 몇 시까지 커피를 만들어달라고 말하곤 사라진 적이 있었다. 전화가 온 것은 약속시간이 가까워진 이후였고 저 대신 직원이 올 테니 그대로 주면 된다고 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쿤은 그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걸 건지, 문자를 보낼 건지가 적혀있었다. 쿤이 무언가 누르려는 순간. 손님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하진성은 팔짱을 꼈다. 분명 나갈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제자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어떤 궂은일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사랑스런 제자가 이렇게 상심할 내용이라면 딱 한가지 밖에 없었다. 분명 또 카페 청년과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제 제자의 반응을 보건데 아무래도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사고를 치고 온 모양이었다. 하진성이 혀를 찼다. -라며 작게 비명을 지른 비올레가 우울하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뒤늦은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제자가 딱해진 하진성은 팔짱을 풀고 비올레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올레야. 뭐라도 말해야 이 스승님이 조언을 해주지 않겠니?”

스승님의 작업은 너무 옛날 방식이라 콜걸들도 안 넘어 온다구요

“...”

 

의도치 않은 폭력에 입을 다문 하진성이 이번엔 차분히 서류를 넘기고 있는 화련을 바라보았다. 장미향이 가득 풍기던 여인은 한심하다는 듯 비올레와 하진성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가 화인이라지만 화인이기 전에 여자라서요. 남자 마음은 모르거든요. 그리고 슬슬 일 좀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녁에 애인이랑 만나기로 되어있어서. 손톱관리를 받아야 하거든요.”

 

살짝 짜증스럽다는 듯 말한 그녀가 정리하던 서류를 비올레에게 놓고는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 비서를 씁쓸하게 바라본 하진성이 술이라도 가져오겠다며 나갔다. 우울하게 내려앉은 공기에 사람마저 없어지자 방 안은 초상집 분위기마냥 어두워졌다. 비올레가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씹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선 안 돼는 거였는데, 로맨틱하게 한 것도 아니거니와 아무리 생각해도 남의 직장에 추파를 던진 무뢰한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태껏 저랑 화인에 미친 늙은 귀족이랑은 다르다고 생각했었는데, 방금 하고 온 짓을 보건데 자신도 그닥 다를 바가 없었다. 뭐라고 사과해야하지. 역시 제대로 사과하고 나오는 게 더 나았었나. 비올레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을 때였다. 오른쪽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 번 울리고 끝인 것이 문자인 모양이었다. 그 닥 일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누군지만 보려고 했던 비올레가 돌연 행동을 멈췄다. 오른쪽 안 주머니에 있는 폰은 그가 개업한지 얼마 안 돼 던 날에 개통한 폰으로 그와 연락할 때 쓰려고 만들어놨던 것이었다. 비올레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그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지 한 달, 이 폰으로 온 거라고는 폰 값을 내라는 청구서뿐이었지만 혹시 몰랐다. 하얗게 빛나는 화면에 짧지만 호의가 들어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보고 싶었던 영화가 오늘 개봉하는데, 같이 보러 가실래요?

쿤 아게로 아그니스.

 

문자를 확인한 비올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비올레가 다른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와의 관계가 더 좋아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액션과 로맨스가 난무하는 B급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비올레는 쿤의 취향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단아한 생김새마냥 얌전하고 예쁜 것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데다 각종 스포츠와 게임도 좋아했다. 특히나 머리 쓰는 게임은 비올레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만 했다. 그는 보기보다 머리가 굉장히 좋았다. 비올레가 온갖 노력을 해야 열 판에 겨우 두 판을 이길 정도였다. 다른 사람과 했다면 속상했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이길 때마다 장난기가 가득 섞인 눈으로 웃는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무표정이거나 업무용 미소만 짓는 그를 보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무언가 하는 그가 생소했고 더 보기 좋았다. 영화와 영화관 내의 각종 게임을 즐기던 두 사람은 근처 고급 레스토랑으로 옮겼다. 괜찮다는 쿤에게 사과를 하게 해 달라며 반 강제로 끌고 온 곳은 귀족들이 즐기는 장소였다. 일반 종업원도 있었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화인들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지배인은 비올레가 높은 사람이란 걸 알았는지, 일부로 화인을 보냈다. 화인은 정중하게 다가가 주문을 받았고 쿤은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사라지는 화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는 높은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주변에서 화인을 보내는 것 보면은 그도 여러 화인을 품어봤을 게 분명했다. 설령 운이 좋아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 하나만을 바라보는 것은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쿤이 유리잔에 손을 대자 비올레가 무언가를 꺼냈다.

 

쿤씨.”

?”

, 저보다 연상이신데 이제 그만 말 놓으셔도 돼요. 그리고 이건 선물이에요. 풀어봐요.”

 

비올레가 쿤에게 건넨 것은 자루처럼 포장되어 있는 선물이었다. 빨간색 포장에 초록색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 것으로 색 때문인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쿤이 리본을 풀고 안을 바라보자 유리병이 나왔고 그 속엔 캡슐로 담긴 약이 있었다. 쿤은 이 약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 화인을 안지 못할 때 먹이는 해독제였다. 물론 일시적이지만 쿤이 먹고 있는 약보다는 효과가 좋았다.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만진 쿤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걸 줄 정도면 귀족이실 텐데, 높으신 분께 함부로 말을 놓았다간 감옥에 끌려가지 않나요?”

“...”

굳이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그냥 저를 안으셔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귀족들에게 화인이란 건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멋대로 당신의 몸에 손 댄 제가 이런 말 하면 우습겠지만. 저는 당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과 인간 대 인간으로써 교제하고 싶어요. 마음은 받아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지만 선물은 받아주세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죽는다면 마음이 너무 아플 테니까.”

“...”

 

쿤이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매만지고 있는 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비올레가 초조하게 손끝을 문질렀다. 달콤한 말로 살살 꾀었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그가 넘어올지 어떨 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정말 얼마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약을 먹지 않는 다면 다음 달에 죽을지도 몰랐다. 강제로 안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런 일을 당한 꽃들은 1년을 버티지 못했다. 비올레는 어떡해서든 자신의 정원에 그를 데려다 놓고 싶었다. 독 때문에 강제로 피는 꽃이 아닌 저를 받을 때만 흥분해서 꽃을 피우는 쿤이 보고 싶었다. 유리병에서 시선을 놓지 않던 쿤이 비올레를 다시 바라봤다.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작은 희망을 품던 금안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완곡한 거절이라는 듯 유리병은 아예 비올레 쪽으로 밀었다. 당황한 비올레가 애원의 가까운 말을 꺼냈다.

 

“...

대신..”

“..?”

 

쿤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모자에서 깜짝 놀랄 걸 꺼내려는 마술사처럼. 의아함으로 물들이는 금안을 즐겁게 바라본 쿤이 마저 입을 열었다.

 

오늘 저희 집에 오실래요.? 어머니께 소개 시켜드리고 싶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금빛 눈동자가 놀라움과 안도로 변해갔다. 비올레가 승낙하듯 부드럽게 웃었다.

 

 

***

 

 

쿤의 집은 그의 성격대로 단정하고 깨끗했다. 비올레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살만큼 작은 집은 생각보다 생활감이 없었다. 정확히는 여자의 흔적이 많이 없었다. 비올레는 무심코 차와 과자를 가져오겠다며 부엌 쪽으로 향하는 쿤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요? 일하시나요?”

, 지금 방에 계실 거예요. 저쪽 방에. 인사라도 하실래요? 어머니가 저를 많이 싫어하시거든요. 그래서 제가 있을 때는 잘 안 나오세요.”

의외네요. 쿤씨는 효자 스타일인거 같은데.”

 

쿤이 거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고개를 숙인 그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화인이에요. 원래는 귀족이셨다는데 화인으로 발현되어서 도망치듯 집에 나가셨대요. 원래부터 난봉꾼이라 다들 신경 쓰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화인임을 숨기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다가 어머니를 만나셨대요. 어머니를 사랑한 건 아니었어요. 귀족 중에 만만한 여자가 보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결혼을 하게 됐죠. 어머니에겐 불행이었고 아버지에겐 행운이었죠. 요즘은 여자들도 이혼 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그럴 수가 없었대요. 어머니는 사랑하는 약혼자와 생이별을 한 뒤, 아버지와 강제로 결혼을 했고 저를 낳으셨어요. 거기까지였다면 덜 불행했겠지만 아버지는 본인이 화인이란 게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어머니를 많이 때리셨어요. 어머니는 갈 곳 없는 절망과 스트레스를 아버지 대신 저에게 풀었죠. 속상하고 힘든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머니께 반항을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커서 어머니의 얘기를 안 후엔 더더욱 그랬구요. 게다가 어머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때리는 게 없어 졌어요. 몸도 약해지셨고. 그래선지 방에선 안 나오세요.”

“...그렇군요. 제가 만나도 괜찮을까요?”

저 이외의 분에게는 친절하신 분이니 괜찮을 거에요. 아마 어머니도 내심 궁금해 하실 테니까. 저는 차를 좀 내올게요.”

 

쿤이 엷게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비올레가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그런 상처라면 계속 사람을 거부해 왔던 게 이해가 됐다. 여자의 흔적이 없던 것도 그녀가 그를 병적으로 거부해 방 안에서만 생활했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비올레가 잠시 턱을 만졌다. 사실 쿤이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가 저를 받아주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지만 그는 그저 어머니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김이 살짝 빠졌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는다면 쿤이 약을 먹어줄지도 몰랐다. 쿤은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꽤 의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이판사판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가 초면부터 방 안에 들리는 건 실례겠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비올레가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노크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크를 해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아들의 친구라 싫으셨나. 아니면 멋대로 집안 얘기를 꺼내서 이야기도 하기 싫으신 건가. 난감해진 비올레가 들어간다는 말을 하고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은 잠기지 않았는지 쉽게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지독하게 풍기는 소독 냄새에 비올레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어둠이 물들여져 있는 공간에 비올레가 한 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주무시고 계신 모양이었다. 어쩌지. 잠시 갈등한 비올레가 방 불을 켰다. 침대에 곱게 잠든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비올레는 천천히 다가가다 멈춰 섰다. 무언가 이상한 걸 본 사람처럼 한 참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만졌다. 그녀의 팔은 고왔고 단단했고 차가웠다.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아니,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비올레의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비올레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쿤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이상 할 만큼 깨끗했다.

 

내가 더 커지고. 더 강해져서 아버지를 이기면. 어머니가 아파할 일도 때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나를 봐 주 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죽였는데, 어머니는 경악하더니 식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어요. 저는 세상에서 어머니가 가장 강한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휘두르듯 그렇게 휘둘렀는데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셨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일어나지는 못하시지만. 같이 자도 곁에 있어주고 때린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그러진 않으시니까요. 그래도 사랑을 하려고 하면, 누군가와 사귀려고 하면 늘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사랑 같은 건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당신이 와줬지. 당연하게도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 화인은 귀족을 원하니까.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낮에 당신과 키스하면서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어. 그때 생각했지. 당신과 함께라면 나도 평범하게 사랑을 하겠구나 하고. 그렇지만 당신을 원하는 화인은 많으니까.”

절 죽여서 가지시려 구요?”

그래.”

저런, 공교롭게도 우리는 목적이 같네요. 쿤씨.”

 

비올레가 재빠르게 쿤에게 달려들었다. 쿤이 뒤로 물러나기 전에 식칼을 든 손을 쳐낸 뒤, 그대로 넘어뜨렸다. 쿤의 손목을 빠르게 한 손으로 제압한 비올레가 쿤의 식칼을 멀리 던졌다.

 

..!”

좋아요. 근데 절 죽이는 거에 실패하면 쿤씨는 제 정원에서 사는 거예요. 제가 원할 때 안기기도 하고, 가끔은 데이트도 하고. 귀족들의 파티에 참가해서 저와 춤도 추고요.”

, 이것, ..!”

쿤씨도 아시겠지만. 꽃들은 각인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인은 죽일 수 없게 되죠. 낮에 제 키스로 어머니의 잔소리를 못들을 정도로 절 좋아하시는 거면. 당신을 안아도 되겠죠?”

 

그의 미소에 쿤의 얼굴이 낭패로 일그러졌다. 비올레가 웃음을 터뜨렸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단아한가 하면 활동적이고 가엾은 피식자인가 싶으면 사실은 포식자였다. 화인이라는 천한 신분임에도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감히 생명줄 이나 마찬가지인 귀족을 죽일 생각을 하다니. 비올레는 찢듯이 쿤의 옷을 벗겼다. 잘 빠진 근육이 한 눈에 들어왔다. 운동을 좋아하고 운동신경도 있으니 체술을 가르쳐도 될 듯했다. 무언가 배우기엔 살짝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이런 판단력이라면 지금 배워도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이 참에 직접 가르치는 것도 나쁘진 않아보였다. 아니면 머리가 좋으니 제대로 교육시켜서 비서로 삼아도 될 듯했다. 붉은 머리의 비서는 해마다 늘어나는 업무량 덕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으니까. 차가운 미인보단 귀엽고 똑똑한 애인 쪽이 여러 의미로 도움이 될 것이다. 단점이라면 쿤 외의 다른 꽃은 가지지 못하는 정도일까. 비올레가 맞닿은 하체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푸른 눈동자 사이로 쾌락을 머금은 물기가 스며들었다. 쿤이 향을 내뿜으며 바르르 떨었다.

 

,, ,안돼..”

 

안돼긴 뭐가 안돼. 비올레는 죽어도 놔 줄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됐을 것을 마음이 비어있는 존재에게 마음을 얻겠다고 꽤나 헛고생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이제껏 고생한 만큼의 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첫날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멀 쓰고 싶었는지 멀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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